[스펙트럼] 다음 세대 사역의 중심 A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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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합회 청소년부(부장 김현태)는 전국 5개 합회 청소년부 및 필리핀 1000명선교사훈련원과 함께 청소년선교사운동(Academy Missionary Movement / 이하 AMM)을 진행했다.
해외선교 복음사역자 양성을 위해 마련한 이 활동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지난해부터 재개됐다.
올해는 인솔지도자와 청년 등 60여 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네팔, 인도, 튀르키예, 대만, 필리핀 등에서 소정의 선교훈련을 받고 전도회를 열었다. 영남합회 청소년부장 오창규 목사가 이 시대, 청소년선교사운동이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 현장의 목소리를 전한다.
1885년 4월 5일. 한국에 도착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연 선교사다. 교회 사역과 학교 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애썼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복음을 전했다.
그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에 목포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배가 심하게 흔들려 한 작은 소녀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아펜젤러는 즉시 물에 뛰어들어 소녀를 구했고 지쳐서 배에 겨우 매달려 있던 그는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고 말았다. 이것이 아펜젤러 선교사의 마지막이었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교회이며 배재중.고등학교도 그가 세운 학교다. 당시 14살이었던 그의 아들 헨리 다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러 온 아버지를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그의 아버지처럼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됐다. 배재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역했으며 6·25 전쟁 때는 세계의 많은 국가와 교회에 한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병이 들어 치료를 받기 위해 미국에 가면서 “내가 죽으면 꼭 조선 땅에 묻어달라. 목포로 향하던 내 아버지가 조선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선 사람에게 꼭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헨리 다지는 지금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시신도 찾지 못한 그의 아버지인 아펜젤러 선교사 기념비도 함께 세워져 있으며 심지어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도 맞은편 땅에 묻혀 있다. 온 가족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는 진리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재림교회는 패스파인더 사역을 통해 우리 다음 세대를 양육하고 있다. 패스파인더 서약의 세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되고 사람의 친구가 되겠다”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를 ‘어디든 갈 수 있는 선교사’로 양육해야 한다. 영남합회는 지난해 필리핀 청소년선교사운동에 이어 올해는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한 튀르키예 안타키아에 다녀왔다. 튀르키예는 큰 지진으로 인해 물질적 피해도 있었지만, 심리적인 피해도 매우 커서 이들을 위한 봉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2개 학교 420명의 학생과 2개 지역의 어린이 190명에게 놀이와 활동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11곳의 쉘터(임시 보호소)에 있는 980가정에 생필품과 물을 공급하기 위해 6일 동안 바쁜 나날을 보냈다. 선교지에 도착하기까지 42시간이나 걸렸고 여권을 잃어버리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원들은 힘들고 불편한 것보다 봉사의 즐거움이 훨씬 크다고 고백했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경험을 하면서 믿음을 더욱 키울 수 있었다. 청소년선교사운동을 통
해 재림교회의 내일이 준비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도움이 없이는 사업을 마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RH 1887.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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