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역사, 한국 출판계 정기간행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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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범태 기자
kbtlove@kuc.or.kr
입력 2014.10.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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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텬사의 긔별>에서 <시조>까지 ... 일제 강압 견디며 출판전도 사명 선도
시조사에서 최초의 월간지로 발행한 것은 1910년 7월 창간해 8월 호까지 발행했다는 <특별한 긔별>이다. 그러나 이 잡지는 기록상으로만 전해지고, 실물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말세복음보> 제1권 제1호를 4X6배판 8면으로 창간했는데, 당시 일제는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총독부를 설치하는 등 식민통치를 시작하려는 때에 말세를 운운하는 잡지가 계속 발행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제호를 <세텬사의 긔별>로 바꿔 1910년 10월에 제1호를 표지도 없이 4X6배판 8면 종서로, 편집인 사엄태(Mimi Scharffenberg), 전시열(C. L, Butterfield) 명의로 발행소 제칠일안식일예수재강림교회에서 발행했다.
출판소는 (1)경성 북부 반송방 월암동 전시열 목사 집 (2)서대문 자문동 4통3반 (3)북부 경구동 72통 9호 (4)서부 양생방 대평동 (5)서소문내 학교동 71통1호 등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출판, 인쇄했다.
그러던 중 1912년 서울 동대문 밖 회기동 현 위치에 부지 1468평을 매입하고 선교본부와 출판사를 신축하고 그해 12월에 준공하여 입주했다. <세텬사의 긔별> 지는 1910년 10월 창간호부터 1916년 10월 호까지 제4권 10호 통권 73호까지 발행 및 보급했다.
월간 <시조월보(時兆月報)>
1916년 11월부터 <세텬사의 긔별>의 제호를 <시조월보(時兆月報)>로 개제하고, 출판사명도 ‘시조월보사(時兆月報社 / The Signs for the Times)’로 바꿨다.
창간이래 한글만 사용하던 것을 국한문혼용으로 바꾸고, 지면도 28면으로 증면했다. 잡지 중간에 삽화를 삽입하고, 표지도 2색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체제를 크게 혁신했다. 초창기부터 1918년 6월까지 출판 및 편집에 심혈을 기울여 오던 사엄태 여사가 신병으로 사임하고, 미국으로 귀국했다.
동생인 왕대아(Theodora Wangerin) 여사가 몇 개월간 편집을 맡아 수고하고, 1919년 3월에 우국화(E. J. Urquhart) 목사가 편집 책임을 맡게 됐다. 이후 1923년 5월부터 다음 해 8월까지 왕대아 여사가 다시 편집을 맡아 수고했다. <시조월보>는 1923년 8월 호 통권 155호까지 발행했다.
월간 <시조(時兆)>
1923년 9월 호부터 <시조월보>의 제호를 <시조(時兆)>로 개제하고, 출판사명도 ‘시조사’로 개명했다. 지면을 32면으로 증면하고, 발행부수도 창간 당시에는 1000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매월 2만5000부를 발행했다. 1923년 9월부터 우국화 목사가 다시 1931년 6월까지 편집을 맡았다. 그러다 1930년 1월 24일 새벽 미명에 원인 불명의 대화재가 발생해 선교본부와 시조사 사옥이 전소하는 참화를 입게 되었다.
같은 해 11만 여원을 투자해 150여 평의 사옥과 선교본부, 중선대회, 본부교회를 각각 분리하여 7월 5일에 기공, 12월 하순에 준공했다. 다음해 1월 15일에는 시조사 신축 낙성식과 <시조> 창간 2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사옥 신축 기간에는 시내에 있는 대동인쇄주식회사와 조선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출판을 의뢰하여 빠진 호 없이 2만5000여 며의 독자에게 <시조>를 발송했다. 1931년 7월부터 왕대아 여사가 다시 편집국장에 취임했다. 1936년 9월 호는 3만9000부를 발행하였는데, 이는 일제 통치 35년 중 최고 부수로 기록된다.
그러나 <시조>는 1941년 4월 호를 끝으로 일제의 탄압에 의해 강제 폐간 당했다. 폐간호까지 제31권 통권 367호를 발행했다.
월간 <건강생활(健康生活)>
1941년 6월 호부터 제호를 <건강생활(健康生活)>로 개제하였으나, 출판사는 ‘시조사’ 명을 그래도 사용했다. 1943년 12월 28일 시조사의 주체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이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됨으로써 <건강생활> 지 역사 1944년 6월 호(통권 34권 3호)로 폐간됐다.
<시조> 속간
<시조>는 해방 후 1947년 10월에 속간 제1호를 발행했는데, 당시 시조사 임원은 이사장 원륜상(R. S. Watts), 총무 문선일(G. W. Munson), 서무겸 회계 정태혁, 편집국장 왕대아, 편집국원 유영순, 오성룔, 송룡환, 김활석 등의 직원이 일했다.
<시조>는 1950년 7월 호까지 발행하고, 6.25동란으로 인해 선교사들은 일본으로 피난을 가고, 사원들은 흩어져서 시조사 업무는 중단됐다. 1951년 10월 호부터 1952년 1월 호까지는 자매기관인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사’에서 인쇄하고, 1952년 4월 호부터 1955년 1월 호까지는 서울신문사, 마포형무소 인쇄국, 민중서관 인쇄국 등 여러 곳에 위탁하여 인쇄. 발행했다.
1955년 4월 호부터는 시조사에서 인쇄 및 발행했으나 정상적으로 인쇄와 발행을 하기는 1959년 4월 호부터였고, 빠진 호 없이 발행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1954년 10월 호는 한국선교 50주년 기념 특집으로 발행했다. 1988년 12월 1일에는 시조사 새 사옥(지하 1층, 지상 3층)을 신축하고, 준공식을 거행했다.
2000년 10월 20일에는 <시조> 창간 9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2001년 5월 15일에는 일제 35년간의 통권 34권 3호, 연 400호 1만5446면을 인간문화사에 위탁하여 전 30권 40질을 영인 출판했다. 2003년 9월 호는 <시조> 1000호 특집호로 발행하고, 같은 해 9월 18일에 연합회 강당에서 기념예배를 드렸다.
2009년 6월 25일에는 시조사 창립 100주년 기념호로 1947년 10월 속간 1월 호부터 1957년 12월 호까지 총 2344쪽을 한 권의 영인본으로 발행했다. <시조> 창간 104주년을 맞이하는 10월 현재 통권 103권 10호, 통권 1133호를 발행함으로 한국 잡지문화사에서 최장호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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